‘청춘희년운동’을 보며 기독시민운동을 고민한다

[복음과상황 304호 커버스토리]


나는 청춘희년운동본부의 기획위원이다. 기획위원들이 모인 ‘단톡방’에 2015년 4월 7일(화) 오후 4시 37분에 초대되었으니 틀림없다. 하는 일이라곤 간혹 회의에 나가서 가만히 듣다가 이것저것 물어보고 내 생각을 조금 밝히는 정도다. 그럼에도 나는 청춘희년운동에 나름의 애정이 있으며, 말석에라도 껴 앉아 있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부러우면 지는 건데, 언제부턴가 청춘희년운동 회의에 갔다 올 때면 마음 한편에 부러운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청춘희년운동은 기존의 기독시민운동과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오늘날 기독시민운동에 대한 답답함 내지는 아쉬움 혹은 안타까움 내지는 간절함 같은 것들로 연결된다. 뭐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다.




질문 하나, 활동가가 주도할 수 있을까?


청춘희년운동을 주도하는 ‘희년함께’는 전통적으로 토지 문제에 천착해온 단체다. 청년들의 부채 문제에 주목해서 그것을 탕감해주자는 것은 2014년 말부터 김덕영 사무처장과 장운영 간사 등 희년함께 활동가들이 주도하여 만든 새로운 의제였다. 그것이 결실을 맺어 2015년 4월에 교회개혁실천연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기독청년아카데미, 복음과상황, 토닥토닥협동조합(현 청년연대은행 토닥), 청어람ARMC, 희년함께 이상 7개 단체가 모여 청춘희년운동본부를 발족했다.


나는 희년함께의 회원이기도 한데, 종종 희년함께 회원들이 토지가 아닌 청년부채탕감 문제를 다루는 것을 아직 낯설어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럼에도 대다수 회원은 희년함께 활동가가 주도하여 시작한 새로운 의제를 존중하고 응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인상도 받았다. 약간의 긴장감과 훈훈함 사이에서, 오늘날 기독시민운동에 대한 첫 번째 질문을 던져본다. 


과연 현재의 기독시민운동에서, 활동가가 주도하여 새로운 의제를 탄생시킬 수 있을까? 



딱히 비민주적이지 않지만, 민주적이지도 않은


이 바닥에는 ‘활동가인가? 실무자인가?’라는 해묵은 질문이 있다. 사전을 찾아보았다. 활동가는 ‘적극적으로 행동하며 실천하는 사람’이란 뜻이고, 실무자는 ‘실제로 업무를 맡아 처리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젊음을 담보로 인생을 걸고 이 바닥에 일하러 들어온 사람이라면, 실무자보다는 활동가가 되길 바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저 해묵은 질문이 보여주듯 스스로를 활동가로 부르길 주저하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가 오늘날 기독시민운동이 딱히 비민주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민주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운동의 세 주체는 1)회원, 2)상근활동가, 3)자원활동가라고 들었다. 사실 이들 모두 회원이다. 다시 정의해보자면 1)생업에 종사하면서 운동을 지지하고 후원하는 회원, 2)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하는 회원, 3)본업을 통해 얻은 명망과 전문성을 가지고 임원으로 참여하는 회원으로 나뉜다고 할 수 있겠다. 이들 세 주체가 협력하여 선을 이뤄가는 것이 바로 기독시민운동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시민운동의 의제와 방향성 등은 유독 ‘임원으로 참여하는’ 회원들에 의해 결정적으로 좌우된다. 회원 총회가 있지만 토론의 장이라기보다는 이사회를 거쳐 올라간 계획들을 절차상 승인하고 서로 격려하는 잔치에 가깝다. 만일 평범한 회원이 임원이 되려면? 나로선 방법을 잘 모르겠다. 활동가는 직위나 연차와 상관없이 왠지 모르게 임원과 구별되는 분위기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봐 밝히지만, 임원들이 무슨 엄청난 패권을 부리는 것은 아니다. 이런 와중에 활동가는 적극적으로 사고하며 새로운 의제를 발굴해내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업무를 맡아 적극적으로 처리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회원들이 새로운 의제를 발굴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워 보인다. 오늘날 기독시민운동은 이런 상황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풀뿌리에 기초한 대의제로 전환한다면


기독시민운동의 이런 모습은 정당 조직과 비교해볼 때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정당은 이론적으로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되고, 당원들은 당직에 대한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보장받는다. 일정 수 이상의 당원들이 의사를 모으면 의제로 다뤄지고 그 즉시로 당론으로 결정될 가능성을 부여받는다. 그렇기에 정당의 전당대회는 늘 긴장감이 감돈다.  


나는 정당의 조직논리를 기독시민운동에 그대로 적용하자고 주장할 만큼 어수룩하지 않다. 다만 위에서 열거한 정당의 특징들을 기독시민운동에 접목하면 훨씬 더 좋지 않겠냐는 생각을 자주 한다.


상상해보자! 지역별로 회원모임을 조직하고 대의원을 뽑는다면? 지역모임을 통해 제기된 의제를 갖고 대의원대회에 모여 ‘계급장’ 떼고 토론하면서 조직의 방향을 결정해본다면? 그렇게 정해진 결론을 가지고 지역모임으로 돌아가 곳곳에서 사람들과 더불어 운동을 벌인다면? 이렇게 된다면 굳이 활동가가 운동을 주도할 수 있냐는 애당초의 ‘이상한’ 질문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어쩌면 지금보다 작아질지도 모르지만 더욱 단단한 운동을 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당연히 어려운 일이다. 그 어려운 것을 하는 사람들이 활동가 아닌가!



질문 둘, 누가 해방되고 있나?


청춘희년운동이 부채문제에 노출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약체라 할 수 있는 청년들에게 집중한 것은 잘한 일이다. 비교적 접촉 가능성이 높은 데다, ‘청년’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화제성도 선점하면서 다른 부채탕감운동과 차별성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청년부채탕감 1차 사업으로 10명, 2차 사업으로 10명이 부채 일부를 탕감받았다. 상담 및 교육까지 합하면 그 수가 조금 더 늘어난다.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어린 양 한 마리의 소중함을 역설한 복음서의 정신을 존중한다면, 수의 많고 적음을 따지는 것은 후진 일이다.


청춘희년운동을 통해 어떤 청년의 삶이 실제적으로 해방되거나, 해방에 가까워진다는 것은 매우 보람 있고 고무적인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기독시민운동에 두 번째 질문을 던지게 한다.


우리 운동을 통해서는 과연 누군가가 해방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많은데, 변하는 것은 없는


사실 기독시민운동 단체와 활동가들은 대단히 바쁘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그리 녹록치 않은 가운데서도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 때로 그들이 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스스로 내리는 어떤 결단들은 정말 가슴 아픈 것들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왜, 이렇게 변하는 것이 없을까?


우선 기독시민운동은 꽤 추상적인 것들이 많다. 교회 갱신·사회 참여·정직하고 윤리적인 삶·자발적 불편 등 이런 주장들은 지극히 마땅하긴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뾰족한 수 없이 구호에만 그치는 경우가 참 많다. 우리가 활동가이고 운동단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넘어 그 이상의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디테일’ 면에서 많이 밀린다.


또 기독시민운동은 큰 문제가 터질 때마다 그것에 빨려 들어가는 경향이 심하다. 무슨 사건이 터지면 연대조직이 만들어져서 의욕을 보이며 활동을 시작하는데 늘 뒷심이 부족하다. 그러다 새로운 사건이 터지면 “그래도 기독인들이 뭔가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선의와 부담감이 작동하면서 회의가 소집되고, 연대조직이 생겨나고, 결국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끝으로 기독시민운동은 소위 뒷북을 치는 경우가 많다. 근래의 기독시민운동이 중요한 사안에 대해 정보를 장악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한 경우가 거의 없다. 대부분 어떤 사건이 터지고 나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논의해서 성명서를 발표하거나 포럼을 진행하고 자료집을 만들어 보관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야구팀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지난해 성서한국 전국대회 현장에서 광고를 하는 일을 맡았었다. 한 번은 수백 명의 참가자 앞에서 “제가 야구를 참 좋아하는데요!”라는 드립(‘발언’을 낮추어 이르는 요즘 말)을 치는 바람에 지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적이 있다. 그들의 가슴이 다시 철렁할지도 모르겠지만, 한 번 더 야구 이야기를 해야겠다.


야구팀은 정규시즌이 끝나면 다음해 목표를 세우고 훈련에 돌입한다. 우승을 노려볼 만하면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가장 약한 부분을 보완하고, 필요하다면 용병이라도 데려와야 한다. 5강 플레이오프 정도는 가능하겠다 싶으면 무리하지 말고 안정적인 운영을 추구하면서, 꾸준히 성적을 내다가 상위 팀이 빈틈을 보이면 바로 치고 올라가야 한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선수들의 자존심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성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팀의 기초부터 다시 세우며 다음 시즌을 노려야 한다. 이렇게 팀별로 목표가 세워지면 감독부터 선수까지 그 목표를 보고 한 시즌을 치른다. 무리해서 이것저것 하는 것보다는, 현실적인 목표에 충실한 것이 진정 팬들을 위하는 길이다.


오늘날 기독시민운동을 야구팀에 비유한다면 어떨까? 아마도 팀의 기초를 다시 세워야 할 것 같다. 우리가 가진 역량을 아주 냉정하고 야박하게 평가해보자. 그리고 많지 않은 목표를 세워, 그것에만 온 역량을 투입해보면 어떨까?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없지만 한두 가지 일을 탁월하게 해낼 정도의 힘과 경험은 갖고 있을 것이다. 어떤 누구는 우리 운동을 통해서 해방을 만끽하게 될지도 모른다.



질문 셋, 함께할 수 있을까?


청춘희년운동에는 기독교단체 외에도 무중력지대 대방동, 청년연대은행 토닥, 청년지갑트레이닝센터 등 비기독교 단체들도 참여하고 있다. 기독언론은 물론이고 일반 언론에서도 이 운동에 관심을 보여주었다.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빚쟁이 잔치’를 벌이기도 했고, 성남시와 협력을 모색해보기도 했다.


설마 이것을 두고 시비 걸 사람은 없겠지.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참 잘하고 있다고 칭찬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오늘날 기독시민운동에 대한 마지막 질문을 해보겠다. 


우리는 기독인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동참할 수 있는 운동을 할 수 있을까?



기독교·교회·기독시민운동 테두리에 스스로 가둬


기독활동가 개인들이야 다른 영역의 시민운동 활동가들을 알고 지내는 경우가 왕왕 있겠지만, 오늘날 기독시민운동은 시민사회 전반과 교류하는 일이 많지 않다. 예전에는 공명선거운동·국정감사모니터링·도박규제네트워크 등 시민사회와 함께 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고 오히려 지도력을 발휘하기도 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노는 동네가 달라진 걸까? 혹여 기독교·교회·기독시민운동이라는 테두리 안에 우리 스스로를 가둬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게토화되고 있다고 비판하던 기독시민운동이, 정작 기독교인만을 대상으로 한 기독교계 이슈에만 집중하면서, 시민사회로부터 게토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세계가 나의 교구’라던 웨슬리의 말처럼, 기독교와 온 세상을 아우르는 운동이 있지 않을까?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던 김수환 추기경의 사목 표어처럼, 기독교인뿐 아니라 모든 이를 자유케 하는 운동이 있지 않을까? 



이제 ‘광장’으로 나가자


청춘희년운동은 청년부채탕감이라는 의제를 제기함으로써 청년단체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다행히 청년단체 분들이 기독활동가들의 선한 마음과 열정을 고이 봐주는 것 같다. 가만히 보면 청춘희년운동이 여러 청년단체의 노하우를 쏙쏙 빼먹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좋지 아니한가!


굳이 말하자면 기독교 동네에서 시작해 시민들이 모이는 광장으로 나간 것이라 하겠다. 기독시민운동이 기독교의 테두리를 넘어 적극적으로 시민사회와 교류하고 동역하면 좋겠다. 낯섦이 없지 않겠지만, 백지장 맞들겠다는데 아쉬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청춘희년운동이 다 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설익은 운동이고 여전히 만들어가는 중인 운동이다. 그러나 거기에 분명 새로운 기운이 있고, 바로 그 지점에서 기독시민운동이 앞으로 나가야 할 실마리가 있다고 생각해 끼적여보았다.




내가 마치 와룡선생이라도 된 듯 기독시민운동에 대해 왈가왈부하며 자판을 두들겼지만, 실은 이런 이야기를 할 깜냥도, 짬밥도 안 되는 사람이다. 보잘것없고 서툴며 못나기까지 한 글을 읽으면서 행여 마음이 불편하셨던 분들이 있다면 정중히 사과드린다. 부디 도중에 책을 덮지 않고 이 끝말을 읽으셔야 할 텐데.



▶복음과상황